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터키
에게해 를 끼고 있고 유러피언들이 최고의 휴양지로 꼽는 지중해...
축구를 좋아하는 나라이고, 한국동란시 참전으로 맺은 인연으로 인해
한국인을 '코렐리'(Koreli)라고 부르며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멀지만 가까운 나라, 신비한 문화만이 아니라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 위치해 있는 터키는 메소포타니아 문명의 발상지 이자
히타이트에서, 로마, 비잔틴제국, 오스만 대제국에 이르는 고대 그리스와 중세 문화 유산등,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거쳐간 곳.
또 초기 기독교의 흔적이 남아있어 많은 성지 순례객들이 터키를 찾음과 동시에
그옛날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이슬람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져 현재는 이슬람국가 이다.
인천을 출발해서 직항으로 11시간이면 이스탄불 아타투르크 국제공항에 도착한다.
이 공항은 영종도 국제공항과 마찬가지로 초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으나
규모는 우리의 영종도 국제공항 보다는 작다.
터키 전체수입의 80%를 관광산업이 자치하고 있으니 얼마나 신비한 나라인가 짐작된다.
수 도 : 앙카라(Ankara, 260만명)
인 구 : 약 7천 189만명(08년 기준)
면 적 : 780,580㎢ (한반도의 3.5배)
주요도시: 이스탄불,이즈밀,콘야
주요민족:터어키(Turkish,90%),쿠르드(Kurd) 및 아랍(Arab, 10%)
주요언어:터어키(Turkish,90%), 쿠르드어(Kurdish) 및 아랍어(Arabic,10%)
지 리
유럽대륙과 아시아 대륙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터키는 에게해,지중해,마르마라해,흑해를 접하고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 마르마라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경계로 아시아지역인 아나톨리아와
유럽지역인 트라케로 나뉘어진다.
위치에 따라 흑해, 말마라, 에게해, 지중해, 중앙 아나톨리아, 동쪽 아나톨리아,
남동 아나톨리아의 7개 지역으로 나뉜다.
기 후
지중해 연안지방의 전형적인 온난성 기후대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터키의 독특한 지형으로 인해
변화무쌍한 기후대가 나타나곤 한다.
흑해 연안부의 따뜻한 기후를 즐길 수 있는가 하면
고산들로 가득한 산악지대에서는 연중 내내 새하얀 설경을 볼수 있다.
사회 문화
기록에 의하면 터키는 기원전 2천년 중앙아시아 동북부에서 기원 하였다고 한다.
터키의 조상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훈족으로, 중국 사람들은 기원전 220년에 수립된
터키의 테오만 야부그 왕국을 흉노라고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터키 국민들은 그들의 조상이 중앙아시아 동북부에서 기원하여 서쪽으로 이동했다고 생각 함.
그 과정에서 16개 군주국이 흥망을 거듭하여 터키인들이 아나토리아 반도에 정착하게 된 것은서기 10세기 경.
중세에 아랍지역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터키인들의 대부분이 회교로 개종하였으며,
아랍문자를 도입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터키 국민들은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자연 숭배사상과 풍습을 오늘날까지도 유지하고 있는데
상당부분에서 우리나라의 풍습과 근본적으로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한국어와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터키어는 문장 구성순서, 모음조화,
어미 활용 등에 있어서 우리나라 말과 같은 원칙을 따르고 있는 점이다.
종 교
터어키 국민의 99%는 회교도(Muslim)이며, 그외 아르메니아,유태교,캐톨릭,그리스 정교 등이 있다.
터어키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세속화된 나라로서 다른 이슬람 국가에 비해
종교적 규율 적용에는 엄격하지 않은 편이며 회교 국가에서는 유일하게 토,일요일을 공휴일로 하는 등
서구화된 면모를 가지고 있는것이 특징적이다.
이슬람의 전통과 관행이 매우 중요시 하지만 법률이나 사회기구가 이슬람 원리를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풍 속
터어키는 종교 공휴일로서 쉐케르 바이람(Seker Bayram : Sweet Festival)과 쿠
르반 바이람(Kurban Bayram : Sacrifice Festival)이 있으며, 매년 날짜가 다르다.
바이람 전 한달동안은 라마단(Ramadan)으로 일출부터 일몰시간까지 금식 하는데,
가장 큰 종교 축제인 바이람 기간중에는 새옷을 입고 친척 방문 등을 하며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카드를 보낸다.
터어키인들은 친족과 가족의 유대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있으며 가족 구성원은 가장의 권위를 존중한다.
터키에서는 생선이 육류보다 비싸다, 한편 터키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국민성
터어키 국민은 오스만 제국의 영광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히 크며,
한국동란시 참전으로 맺은 인연으로 인하여, 한국인을 '코렐리'(Koreli)라고 부르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전통적으로 체면과 무예를 존중하며, 매우 정열적이고 다혈질이나 서두르지 않으며,
신앙의 전사(戰士)라고 불리는 가지(Gazi)의 정신을 윤리의 주요 덕목으로 생각하고 있다.
터어키인들은 민족의식이 매우 강하며, 지정학적인 특성으로 동서양의 사고방식,양식을 함께 갖고 있다.
통 화
터키의 통화 단위는 터키리라(TL)이다
11/5/9 현재환율은 1$=1080원,1$=1.54T리라, 1리라=717.738원,1유로=1554원 이다
은행 근무시간은 08:30-12:00, 13:30-17:00(월-금요일)이며,
은행이나 환전소(Kambiyo)에서 환전하면 된다.(환전소에서 환전하는 것이 다소 유리)
전기전압
220V, 50Hz
한국으로의 전화
- 호텔에서 전화를 이용할 경우: 0 또는 9번(외부전화 접속, 호텔마다 확인 필요)
+ 00 + 82 + 0을 뺀 지역번호 + 전화번호
- 공항 또는 시내의 국제전화가 가능한 공중전화를 이용할 경우: 00 + 82(한국 국가번호)
+ 0을 뺀 지역번호 + 전화번호
- 한국으로의 수신자부담 신청번호: 00-800-828282
이스탄불에서 쇼핑하기
터키의 특산품은 독창적이며, 정교한 세공으로 정평이 나 있다.
각종 수공예품, 세계적으로 유명한 터키산 양탄자, 수공 도자기 제품들,
구리세공품, 메르샤움이라고 불리는 담배용 파이프, 각종 골동품 등은
터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최고의 기념품으로, 또한 선물로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외에도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는 가죽이나 스웨터 제품 역시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18개의 출입구와 4천개 이상의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이스탄불의 구 시가지에 위치한 카팔르 차르쉬(그랜드 바자르 라 하기도 함)는
세계의 가장 큰 바자르 중의 하나로 터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은 관광명소로도 손꼽히고 있는 곳이다.
토요일은 일찍 문을 닫으며 일요일과 종교적 휴일에는 폐점한다.
반면 무스르 차르쉬쉬(Misir Carsisi) 시장은 각종 향료의 유혹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이 곳에서는 동양 특유의 신비한 세계로 빠져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시장들이 각종 물건들과 사람들로 항상 북적대는 대중을 위한 장소라면
타크심-니샨타쉬-쉬슬리를 연결하는 지역들은 정교한 보석류와 높은 수준의 핸드백,
신발 등의 가죽제품, 미술품 등을 파는 세련된 상점들이 밀집한 고급 쇼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점들은 보통 8:30-19:00까지 개장하며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
양탄자나 보석류, 가죽제품을 구입할 때는 현지 사정을 잘 아는 가이드의 도움을 받거나
거리의 가판대가 아닌 믿을 만한 상점을 이용하도록 한다
터키산 양탄자
터키산 양탄자는 두말한 나위도 없을 만큼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유명할 수 있었던 것은 터키라는 나라가 지니고 있는
환경, 사회, 경제, 종교적인 요인들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라 하겠다.
터키는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가 아주 뚜렷한 온난지대에 위치해 있다.
이에 항상 변화하는 온도에 민감하게 대처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했고
이런 이유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양탄자인 것이다.
터키에 살던 유목민들에게 있어 텐트 바닥에 유일하게 깔려 있던 카페트는
벌레차단의 수단이자 땅을 편평하게 해 주는 도구이면서
따뜻하게 몸을 보호해주는 생활필수품 이었다.
터키에서 카페트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으나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때는 셀주크 시대로, 이는 13세기 마르코 폴로가 이 곳을 다녀가면서
남겨놓은 양탄자들의 아름다움과 예술성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5-6세기, 터키산 양탄자는 유럽 화가들의 그림 속에 등장하게 됨으로써 더욱 유명해진다.
그리고 17세기, 대표적인 중상주의 국가로 발전한 네덜란드의 화가인 벌미르(Vermeer)는
자신의 그림에서 터키산 양탄자는 바닥에 깔기에는 너무나 귀중한 것이어서
성모와 왕족의 발 아래가 아니면 깔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하기에 이른다.
수세기동안 아나톨리안의 여성들은 그들이 손수 만드는 양탄자 속에
그들만의 희망과 공포, 관심, 정절과 사랑을 표출해 내고자 하였고
이는 각각의 양탄자가 지니고 있는 화려한 색상과 독특한 문양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
세공품
장인들의 높은 기술에 비하여 훨씬 싼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오니키스, 금, 은, 황동, 동의 수많은 세공품들과 다양한 종류의 가죽세공품도 유명하다.
특히 가죽세공은 오스만 제국 시대부터 꾸준히 발전된 분야로,
현재 직물에 이어 터키의 제 2의 수출품목이다
수공예품
해포석 파이프와 터키 특유의 다양한 소재의 수공예품들은 터키 특산품의 매력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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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1대를 왕복으로 160만원에 계약하고 새벽 2시반에 출발 해서 인천공항에는 6시40분쯤에 도착했다
일행들이 배가 고프다해서 들른 식당에 된장찌게가 부가세 포함하면 14,300원이다.
09:45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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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끼고 위치한 이스탄불은
2000년이 훨씬 넘는 그 역사에 걸맞게 아주 자연스럽게 양 문화와 상업의 교류지로서
역할을 다하여 왔다.
세계를 지배한 3대강국인 로마, 비잔틴, 오스만제국의 수도이기도 했었던
이 곳은 오늘날까지도 도시 곳곳에 과거 번영의 흔적들을 보존해놓고 있음으로서
생생한 역사의 장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200만명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도시로서의 면모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고,
또한 서양과 동양의 절묘한 조화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아주 묘한 신비가 깃들어 있는 도시라고 하겠다.
이스탄불이 세계적인 국제 도시로 발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데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바로 보스포러스 해협이기 때문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해협으로
흑해의 자원들이 서방으로 나가는 경제적 지름길이다.
지리적으로 보스포러스 해협을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나눠지기때문에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가 공존하는 유일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두고 동쪽의 아시아 지역은 대부분 주거지역이 되고
서쪽의 유럽지역은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유적지가 모여있는 구시가지인 술탄 아흐멧 지역은 유럽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로마/비잔틴/오스만 제국의 궁전과 교회가 모여있고 모두 이지역에 몰려있다.
그랜드 바자르 관광
비잔틴 시대부터 현재 그랜드 바자르가 있는 장소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후 터키가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서 1455-1461에 걸쳐
그 곳에는 도시의 경제생활을 부강하게 만들 목적으로 두 개의 주 아케이드가 만들어졌다.
이후 사람들은 활발한 상업활동을 위한 더 많은 장소를 필요로 하였고
그 결과 주 아케이드의 바깥부분까지 그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오토만 시대를 거치면서 지진,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던
이 곳은 몇 번에 걸친 복구 끝에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18개의 출입구와 4천개 이상의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는
세계의 가장 큰 바자르 중의 하나로 터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은 관광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토요일은 일찍 문을 닫으며 일요일과 종교적 휴일에는 폐점한다.
이스탄불 도착 하자마자 곧바로 그랜드 바자르로 갔는데 규모는 엄청나게 크고 다양한 제품이 있었다,
마지막 날 돌아오는길에 한번더 들리리라 생각했는데 우리 가이드는 그럴기회를 주질않아 안타까웠다,
들은 바로는 여기에는 터키제품이 없다고 한다,
내가 사오고픈 가죽가방이 약 6만원 정도 했다(에구 아까버라...)
히드포럼
본래 이곳은 196년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Severus)에 의해 지어진 검투 경기장이 었는데,
4세기 무렵 비잔틴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검투 경기는 금지되고
대신 말이 끄는 마차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10만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다고 하는 이곳은 경마장으로 이용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진 수많은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3세기 초 십자군의 침입으로 이 광장에서 비잔틴군과 치열한 접전이 벌어저 대부분의 광장 내 유적이 이때 파괴 되었고
지금의 광장은 텅 비어있고 귀중한 세개의 기념비만 보존되어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 곳에는 아주 귀중한 세개의 기념비가 있는데 하나는 보수하고 있었다.
뒷편에 보수하고있는 탑이 보인다
오벨리스크
"디킬리타스(Dikilitas)"라고 불리는 이집트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500년 경, 이집트의 투트모스 3세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카데쉬 메소포타미아 전투에서
히타이트 군대를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집트 나일강가에 있는 룩소르 카르낙 신전에 세운 것이다.
이 오벨리스크를 이집트에서 가져온 사람은 유리아누스이며,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곳에 옮겨 세웠다해서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라고한다.
연분홍 화강암 무게 300톤, 높이 26m, 대리석밑바침에는 전차경기모습,
관전하는 황제 춤추는 무희들이 새겨져있다.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 숭배의 상징으로 세웠던 네모진 거대한 돌기둥으로 된 기념비인데
하나의 돌로 구성된 통돌로 위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지고 꼭대기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되어 있다.
기둥면에는 주로 태양신에게 바치는 종교적 헌사나 국왕의 공적 등을 상형 문자로 그려져 있다.
연한 핑크색 화강석의 오벨리스크는 무계가 약 300톤, 처음 높이 32.5m인데 현재의 높이는 20m이다.
오벨리스크의 4면에 이집트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둥이라고 알려진 "오르메 수툰(Orme Sutun)" 이 보수 중에 있었고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온,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뒤엉켜
직경 3미터의 황금 그릇을 받치고 있는 형상의 셀팬타인 기둥(Serpentine)이 있다.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원)
오스만 시대에 지어진 직경이 27.5m, 높이가 43m에 다다르는 술탄아흐멧 모스크는
규모면에서 터키 최대의 것으로, 맞은편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우위를 상징하기 위해 그 양식을 모방, 발전시켜 건축한 독특한 형상의 회교사원이다.
그 내부의 벽과 기둥이 푸른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블루 모스크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돔의 200개가 넘는 조그만 창은 스태인드 글래스로 장식되어 있어
이를 통해 들어오는 아름다운 햇살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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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카프 궁전
터키의 자랑이며 오스만제국 심장이다.
술탄 메흐메트2세 때 지어진 거대한 궁으로 세개의 문과 네개의 거대한 중정이 있는
궁이며 돌마바흐제 궁전과는 매우 비교되고
오스만 제국 당시 주변국의 왕들이 헌납한 진귀한 보석들이 가즉 차 있다
당시 오스만 슐탄은 외국사신이 오면 동아줄로 동여메고 슐탄 앞에 내동게 첬다고 한다
궁에서 가장 사랑받는 유물은 궁전의 보석관에있는86캐럿의 스푼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검을 포함해서
마호멧의 발자국 등역대 술탄의 물품들이 전시되어있다
성소피아 사원
성소피아 박물관은 마치 이스탄불에 산재해 있는 여느 모스크와 비슷해 보인다.
간혹 사람들은 마주보고 있는 블루모스크와 아주 흡사하다고 느낄것이다.
하지만 성소피아 박물관이라는 정식 명칭보다
성소피아 성당이라는 가장 최초의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듯 이곳은 최초에는 성당이었다.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규모면에서도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성소피아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하고
이 곳에 거하기로 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도시의 큰 사원'으로 325년 창건했던
성 소피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에 따라 532년-537년에 다시 크게 개축되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성소피아 사원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면서 이 곳은 회교사원, 즉 모스크로 그 용도가 바뀌면서
성당을 둘러싸는 미나레트가 세워지고,
성당안에는 회칠로 덮여 이슬람교의 코란의 금문자와 문양들로 채워졌다.
회칠속으로 성모마리아의 모자이크는 모두 사라졌다.
이후 복원작업이 진행되면서 두꺼운 회칠이 벗겨지면서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비잔틴시대의 화려한 흔적들이 드러난 결과 놀랍게도
회칠을 한 안쪽에는 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복원작업도 중단된 상태로 박물관으로 변경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성소피아 성당의 중앙에 서면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가 공존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는 역사적인 장소임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 본당의 넓이 75m X 70m 로 7,570 평방 미터에 달하고
천장높이는 55.6m, 돔의 지름은 33m에 달하여 세계에서 다섯손가락 안에드는 높이이며
40개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구조이다
성소피아 성당 관람후 점심을 먹고 오후내내 445Km 떨어진 터키의 수도 앙카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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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카라
터키의 수도이다.
이스탄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신도시로서
BC 25년에는 로마제국의 지배에 속하고 앙키라라고 불렀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에 세워진 신전과 욕탕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그 뒤 페르시아,아라비아,셀주크투르크,십자군 등에 의하여 점령 지배되었고,
14세기 후반부터는 오스만투르크에 속하여 아나톨리아 지방의 대상무역(隊商貿易)의
지방적 중심으로서 번영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뒤 터키를 재건하기 위하여 케말 아타튀르크(파샤)가 이끄는 국민군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1923년 새로운 공화국 성립과 더불어 수도인 이스탄불을 대신하여 새로운 수도로서 발족하였다.
수도가 되기 전 앙카라는 앙고라 염소와 그 질고 긴 털로 만든 앙고라 모피로 유명했다.
한국공원
앙카라에 있으며 한국전쟁때 참전한 1만5천명의 터키군을 추모하는공원
내부에는 한국양식의 석탑과 기념비가 있다
6시40분 출발 한국공원에 들러서 내전에 16000명이나 참전한 터키 쿠르드족에게 잠시 경의를 표하고
다음 장소인 소금호수와 카파토키아를 향해...
카파토키아 가는길은 그야말로 끝없는 대평원이 이어젔다
저 넓디넓은 광야에서 사는 민족은 어떤생각으로 살까 라는 생각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비옥한 땅이 많으니 게으르고 유랑하며 살아갈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이동중 실지로 천막을치고 사는 쿠르드족 유목민을 보기도 했다
소금호수~~~무려 한시간을 달려도 끝이 나오질 않는다, 총길이는 81km
한 여름에만 채취 하는데 막바로 먹을수는 없고 조제해야 한다고 했다
사진의 바닥을 보면 소금이 허옇게 깔려있고 맛을 보니 무쟈 짜다,
카파토기아
신이 만든 환상적인 자연의 낙타바위,버섯바위 등 해괴한 형상과
거기에 인간에 의해 조형된 로마시대때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하기위해 암석을 깎아 만든 교회
햇살은 무쟈 따거우니 유럽인들이 선그라스를 즐겨 사용하는 이유를 알것만 같다,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다.
아이스크림 맛은 쫀득한게 좀 특이하다
또다시 데린구유로 이동 고대 로마시절이 이주한 기독교도들이 이슬람의 박해를 피해 숨어지낸
미스테리한 지하도시, 여기엔 생활시설 심지어 마굿간도 있다
구러나 아직까지 접근 금지인구역도있어 관람할수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치히사르에 들러 유며한 터키 양탄자를 구경하고
(일행중에 2명이구입, 터키 양탄자는 매듭을 2겹으로 짜는것이 특이하다 함)
호텔식사후 발리댄스 공연관람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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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기상
지갑이 없다
그러나 혹시 어디 있겠지 하는 맘으로 그대로 열기구를 타러 나간다
약1시간반에걸친 비행은 환상 그자체 뭐라 말이 필요없는 신비의 세상이었다
더구나 마치고나서 무사히 마첬다는 뜻으로 간단한 삼페인 파티까지 열어준다
출발 전 베낭 깊숙히 넣어둔 지갑을 찾었다^^
나중 가만히 생각해보니 전날 발리댄스 관람후 취한체로 새벽에 나갈 준비 하는과정에서
배낭 주머니 깊숙히 넣어뒀는 것 같았다
핫산산 3260m 휴게소를 들리고
무슬림들이 기도전 발씻는 장소에 모르고 소변을 누다
(아무도 없었는데 누가 봤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파묵깔레
석회석이며 18000년전 형성 되었고 지금도 자라고 있다
터키 남서부 데니즐리 주에 위치해 있고
터키어로 ‘목화의 성’이라는 의미로 경사면을 흐르는 온천수가 빚어낸 장관 때문에
붙은 이름이며 아름다운 자연과 유서 깊은 고대도시 유적이 어우러진 곳이다.
석회성분을 다량 함유한 이곳의 온천수가 수 세기 동안 바위 위를 흐르면서 표면을 탄산칼슘 결정체로 뒤덮어
마치 하얀 목화로 만든 성을 연상시키며 산전체가 멀리서 보면 눈덮힌 산 같다.
이 온천수는 섭씨 35도로 류머티즘, 피부병, 심장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치료와 휴식을 위해 그리스, 로마, 메소포타미아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로마 시대에는 여러 황제와 고관들이 이곳을 찾았는데
하얀 결정체가 대지의 경사면을 온통 뒤덮은 장관을 감상하면서
심신의 치료를 겸할 수 있는 최고의 휴양지였기 때문이다
히에라 폴리스 원형극장
히에라폴리스는 파묵칼레의 언덕 위에 세워진 고대도시다.
기원전 2세기경 페르가몬 왕국에 의해 처음 세워져 로마 시대를 거치며 오랫동안 번성했다.
기원전 130년에 이곳을 정복한 로마인은 이 도시를 ‘성스러운 도시(히에라폴리스)’라고 불렀다.
그리스어 ‘히에로스’는 신성함을 뜻한다.
이곳에는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 신전, 공동묘지, 온천욕장 등 귀중한 문화유적이 남아 있다.
원형극장은 최대 1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으며
1200기의 무덤이 남아 있는 거대한 공동묘지도 있다.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 유적 중에 하나인 이곳에는
지금도 수많은 석관들이 뚜껑이 열리거나 파손된 채 여기저기 널려 있다.
테르메라고 하는 온천욕장은 온욕실과 냉욕실은 물론 스팀으로 사우나를 할 수 있는 방,
대규모 운동시설, 호텔과 같은 귀빈실, 완벽한 배수로와 환기장치까지 갖추고 있었다.
고대 로마귀족이 여기에휴양을 왔다는 곳이고
클레오파트라가 즐겼다는 온천탕도 만나고...
그러나 여기서 비를만나 히에라폴리스 주경기장인 검투장을 멀리서만 바라봤다,
그리고 고대로마의 귀족이 되어 수영복을 입고 온천욕을 즐겼다.
저녁에는 양갈비를 겻들여 터키 민속주를 쭈~욱...
번영과 몰락
히에라폴리스는 로마에 이어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번성하였으며,
11세기 후반 셀주크투르크족의 룸셀주크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파묵칼레’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지배세력의 변천 속에서도 지속적인 번영을 누려왔던 히에라폴리스이지만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1354년 이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는 폐허가 되었다.
대지진 이후 역사 속에서 사라진 도시를 1887년 독일 고고학자 카를프만이 발견하였고
이후 발굴 및 복원작업이 진행되었다.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유적을 동시에 갖춘 이곳은 1988년 유네스코 자연유산 및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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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탈리아
종일 버스로 이동 하다
호텔을 출발 곤야를 거처 지중해 최대휴양지이자 천상의 도시 안탈리아로 출발...
안딸리아(Antalya)의 옛날 이름인 Attaleia는 B.C.150년에
팜필리아 해안에 도시를 세운 페르가멘의 왕 Attalos 2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지중해 서쪽 터키 남부에 위치한 이 도시는 터키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자연미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 지금도 신들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과거의 신비로운 도시이며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해안을 볼 수 있다.
고대에 이 곳은 '모든 종족의 땅'이란 의미의 팜필리아 지역에 걸쳐 있었다.
이 곳은 그 이름처럼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많은 민족이 거쳐간 도시이다.
BC 1세기에 페르가뭄의 왕 아딸루스는 신하들에게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발견할 것을 명령했고 그는 지상의 파라다이스를 원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전세계를 다 뒤진 후에 그들은 이 곳을 발견했고
여기가 천국임에 틀림없다고 전했으며 아딸루스 왕은 이 곳을 Attaleia라 이름지었다.
그 후로 많은 나라들이 이 곳을 주목했는데 로마인들이 페르가멘 왕국을 지배하게 되고
AD 13세기에 로마황제 하드리안(Hadrian)이 이 곳에 다녀가면서
Attaleia는 로마 도시중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곳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지은 아치가 지금까지 남아 있기도 하다.
셀주크 투르크가 1207년 안딸랴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이 도시는 아달랴(Adalya)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려졌고 오토만 또한 셀주크의 명칭을 따랐다.
이 곳이 터키 공화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중요한 항구 도시가 되었다.
열대 지중해 기후로 여름에는 고온건조하며 겨울에는 비가 많이 내린다.
4월에서 10월에는 따사로운 태양이 내려쬐고 겨울에도 온화한 날씨를 보인다.
습도는 64%로 약간 높은 편이고 평균기온은 21.5 °C이다.
안딸이라의 여름은 8~9달가량 계속되며 천상의 날씨를 보인다
우리는 지중해 최대의 휴양지 안탈리아 의밤을 이렇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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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일어나
로마의 황제 하드리안을 맞이하기위해 세운 문 3개의 아치와 4개의 고리도식 기둥이 있는
하드리안 문을 거처 지중해 한가운데로 나가는 유람선을 타 보았다
배안에서 일행의 회갑 공연도 하면서...
지중해의 에머럴드빛 어쩌고 저쩌고 하는걸 여기와 보니 알것만 같다
서울 우이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회갑연을 우리가 지중해 유람선에서 열어 드렸다
높이 38M이며 동 로마시대의 교회였던 아울리 탑도 비를 맞으며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에페소로 출발
도중에 쉬린제에 들렀다
마을 종업원이 한국말을 아주잘한다,
그리스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그리스풍의 시골도시로 지금은 포도주 마을로 유명해진 곳
골목골목 포도주를 팔고 있으며 시음이 가능하고 값싼 포도주를 살수있다
여기서 참고로 들려본 왠만한 도시의 가계종업원은 거의다가
한국말을 구사하는걸 경험하면서 자본의힘은 크다는걸 또다시 느끼다.
점심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바쁜일정으로 오랫동안 예길 나누진 못했는데 나이는70이고
30년전 주방장으로 터키에 저착했고 곧 정리후 한국으로 돌아간다고했다
5만불에 가계를 한국인에게 넘긴다나...
에페소 고대도시
당시의 로마 여성들, 에페소에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으리
한마디로 카톨릭의 성지이며 소아시아 서해안에 있던 이오니아의 고대도시.
터키 이즈미르의 남서쪽 약 50km 지점으로, 양항(良港)을 끼고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BC 620년경 이곳에 세워진 아르테미스신전(神殿)은 소아시아에서 그리스에 이르는 지역에서
많은 순례자모여 들던곳 이다.
이곳은 BC 7세기∼BC 6세기가 최성기(最盛期)
그러나 BC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
페르시아전쟁으로 해방이 된 뒤에는 그 세력을 떨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 원정 뒤 헬레니즘시대에 이르러 경이롭게 부흥하였다.
1세기 성 바울로는 이곳에 그리스도교를 전하였으며(54, 55∼57),
또한 로마에서 이 지방 신자에게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
오늘날 이 도시의 폐허에서는 수많은 유적이 발굴된다.
에베소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이 중에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있는 곳이다.
이 신전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큰 것으로 거대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그리스인의 구전에 의하면, “지금까지 태양이 운행하는 중에
아데미 신전보다 더 훌륭한 것을 보지 못했노라”고 하는 격찬의 말이 있다.
이 신전에서의 여신을 숭배하는 모습은 기묘하고 황홀하고 광적이다.
고함소리와 울음소리를 동반한다.
나팔이 울리면서 분향을 시작하게 되면, 군중들은 흥분과 발광으로 날뛴다.
게다가 음탕하고 수치스러운 일들을 서슴치 않고 행하였다.
에베소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였다.
에베소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숭배했던 아데미 여신은 가슴에 유방이 24개가 달린 풍요의 여신이다.
아데미 여신의 머리에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성이 있고,
몸에는 특이한 사냥꾼 니므롯을 상징하는 사자, 호랑이, 사슴 등의 다양한 짐승들의 부조로 새겨져 있다.
매년 5월 아데미 여신의 축제날이 되면 유방과 같은 수의 24명의 흰 옷을 입은 여자 사제들이 앞에 서고,
뒤에는 자신의 고환을 아데미 여신에게 바친 남자 사제들이 여신의 호위병처럼 뒤 따른다.
축제의 행렬은 아데미 신전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데미 신전에서 출발한 아데미 신상과 축제 행렬은 에베소 시의 동쪽에 있는
마그네시아 문을 통해 입성하고, 동방 체육관과 시장, 음악당을 지나서 에베소 시청에 이른다.
대극장, 셀수스 도서관, 시리아 풍의 히드리아누스 신전
이런 산골짜기에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로마시대 건축물이 있다는게
그저 신비스럽고 그리고 웅장함에 압도당한다
아쉬운건 파괴된체 방치되고있는 유물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는게 안타까웠다
이렇게 폐허가 되어있다
아이발릭(연인들의 해안)
터키 서부 에게해안의 항구도시로, 그리스 영토인 레스보스(Lesbos) 섬과 불과 20km 떨어져 있다.
소나무와 올리브나무가 울창한 낮은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보인다. 해안에는 준다(Cunda) 섬을 비롯한 작은 섬들이 있다
고운 모래로 덮인 해안과 인근의 섬들이 해양 스포츠에 적합하고,
주변의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 최근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주민들은 주로 어업과 관광업에 종사하며 주요 산물은 올리브 제품이다.
에게해를 바라보는 호텔에서 일행과 처음으로 간단히 파티로 일행모두가 진솔한 밤을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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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유적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나를 두고 스파르타와 트로이 사이에서
10년 동안 계속된 영웅과 신들의 전쟁이야기.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스에 묘사된 트로이 전쟁은 수세기 동안 인구에 회자되었으나
1871년 독일의 부호 하인리히 슐리만이 유적 발굴에 성공하기 전까지는 전설로만 치부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들려준 트로이 전쟁에 대한 얘기에 깊은 영향을 받은
슐리만은 평생 트로이 유적 발굴에 대한 꿈을 키웠고,
결국 49세 되는 해에 유적 발굴에 성공, 트로이 전쟁이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실제 역사임을 입증했다.
트로이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신화이자 가장 유명한 고고학 유적지가 되었다.
트로이 유적은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중간, 흑해와 에게해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에게해에서 6킬로미터 떨어진 히살리크 언덕 위에 있는데
바다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 외부의 침입을 막고,
교역을 하기에는 편리한 위치다. 문명 발달에 유리한 위치였기 때문에
이미 기원전 4천년 경부터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총 9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유적
유적은 총 9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층은 시대별로 형성된 도시 문명이다.
최하층인 제1층부터 이미 성벽을 만들고 금속 문화가 있었으며,
기원전 3천년 대 후반에 형성된 제2층은 높이 120m의 높고 견고한 성벽을 갖고 있었다.
길과 집터, 신전 터,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원형의 성벽은 규모가 작지만 견고하고 당시의 무기체계로는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성이었다.
현재 트로이는 일리아스 속 트로이 전쟁의 도시로만 널리 알려져 있지만,
수 천년 동안 에게해를 중심으로 유럽과 레스보스 섬, 소아시아 각지와 교류하는 문명의 중심 도시였다.
처음 발굴 당시 슐리만은 제2층을 트로이 유적이라 생각했으나
1930년대 미국의 블레겐이 재조사를 시행한 결과
기원전 1250년경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7층을 트로이 유적으로 여기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대지진과 트로이의 목마
트로이 유적에는 대규모 지진의 영향이 남아 있다.
트로이 10년 전쟁은 지진으로 인한 성벽 붕괴와 도시의 파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지진을 관장하는 신은 포세이돈인데,
포세이돈을 상징하는 동물이 말이었기 때문에
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해 트로이의 목마이야기가 탄생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현재 유적지 입구에는 일리아스 속 트로이의 목마를 재현한 목마상이 관광객을 맞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청동기 역사와 그리스 로마제국 까지 약 3500여년 동안 대 제국 이었으나
지진으로 멸망했다고 한다
사실 생각했는거 보다는 썰렁했다
다르다넬스 해협
지중해 동북쪽 갈리폴리 반도와 소아시아 반도 사이에 있는 좁고 긴 해협.
에게 해에서 흑해로 통하는 통로로, 보스포루스 해협과 함께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이룬다.
길이는 61km, 평균수심 54m, 폭은 1~6km
15세기 이후 터키가 이 해협의 항행권을 독점하고 있었으나
18세기에 흑해로부터 남하해온 러시아와 이것을 저지하려는 영국,프랑스 사이에
항행권을 둘러싸고 ‘해협문제’가 일어났다.
1841년 런던조약에 따라 이 해협은 모든 나라의 상선(商船)에 개방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터키가 독일 쪽에 가담했기 때문에
연합국은 해협을 점령하기 위하여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터키가 중립을 유지했기 때문에 해협을 둘러싼 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차나칼레로 이동하여 랍세끼항에서 배에 버스를싣고
1차 세계대전 당시 격전지로 유명한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유럽땅으로 건넜다
내가 가장 먹기 힘드는 고등어 케밥으로 점심식사후 마르마라해를 따라 이스탄블로 이동,
형제의 나라라는 연유는 덕수장씨 시조는 쿠르드족이라 하고
징기스칸이 세계를 정복할때 가장 공이 큰 족이 쿠르드 족,
그리고 나서 당시 쿠르드족이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와서 정복자로서의 권세를 누렸다고 함
17;30 이스탄블 도착
저녁식사 전 토산품센터 19;00
토산품 가계에서 터키술 라크와 로큼을사다 20;00
그리고 저녁에는 가이드가 위험하다는 곳으로 가봤는데 그렇게 많은인파는 첨봤다
이스탄불의 젊은문화와 예술이 여기에 모여 있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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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나 어제밤에 들렀던 이스탄불이 훤히 보이는 전망대로 일행을 안내하기위해 다시갔다
보스 포러스 해협과 유람선
보스포러스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해협으로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고 있다.
길이가 약 30km, 넓은 곳의 폭이 3500m, 좁은 곳이 700m로,
물 흐름이 세차서 여기저기에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
양측 해안에는 고대 유적지, 그림같이 아름다운 전통적인 터키 마을,
울창한 숲 등이 곳곳에 있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음식점, 찻집, 별장 등이 있는 매우 조용한 곳이다.
고대, 중세만 해도 지중해와 흑해간의 거의 모든 상거래는
이 해협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무역에 있어 보스포러스 해협의 중요성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져
매년 38,000여척의 배들이 이 곳을 통과하고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전용유람선을 타고 우리는 흥에겨워 차차차를 부르다
돌 마흐체 궁전
가득찬 정원이란 뜻의 마바흐체 궁전은 해변을 흙으로 메꾸고 세운 곳이다.
50만 금화, 즉 현재 돈 5억불에 맞먹는 기금으로 건립된 이 궁은 1856년 완공되었는데,
궁의 내부 장식과 방들을 꾸미기 위해 총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3층의 대칭구조로 지어진 궁의 내부에는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280개의 화병, 156개의 다양한 시계,
영국에서 헌상한 4.5톤과 2.5톤 중량의 샹들리에를 포함한 36개의 샹들리에, 58개의 크리스탈 촛대,
560점 이상의 그림, 손으로 직접 짠 대형 카페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급격히 악화되어가는 시점에서 이를 만회하고자
서구화를 추진하고 국력 쇄신을 도모하던 압두메짓 1세가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 초호화판으로 이 왕궁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결국 막대한 건축비 지출은 어려웠던 왕실 재정을 더욱 악화시켜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 일행은 돌마바흐체궁전 관람후 점심식사를 끝으로13;20
이리하여 8박8일의 모든일정 끝나고
현지시간으로 5월21일 16시 우리시간으로 5월21일 23시 출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다
여행 Tip
1. 여권,카메라, 충전기,면도기, 소가방(베낭)슬리퍼,선그라스,우산
2. 복장 : 우리나라와 비슷 상의,하의,양말,모자,반바지,장갑,수영복(모자포함)
3. 상비약(소화제, 멀미약, 해열제 등)
4. 세면도구, 치솔,치약,휴지,수건, 화장품, 물티슈, 헤어 드라이어 등
5. 간식거리 : 초코렛, 사탕, 컵라면,커피,약간의소주
6. 기타 : 자외선 차단제, 보온병, 칼(부칠것),커피포트 필수
여행 뒤에는 언제나 여운이 따른다
이번 여행도 여느때나 다를 바없이 또 다시 떠나고픈 충동을 안고 일이 손엘 잡히지 않으니...
거기에 우린 최고중 최고 기막힌 가이드를 만났다
터키사, 세계사, 지리,노래, 콩뜨, 등 못하는게 없고 모든걸 이번 여행과 결부하여 우리를 꼬지에 꿰고
줄줄줄~역사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달변가 다
부디 건강하고 빨리 결혼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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