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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매국노 이완용의 영욕

by 월하소회 2009. 9. 16.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됨으로써 34년 11개월간의 혹독한 식민 통치가 시작됐다.

올해로 99년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조약(1905)과 국권을 완전히 상실한 한일병합 뒤에는

‘매국의 상징’ 이완용이 있었다.

척사파,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변신을 거듭한 ‘한국 근대사의 카멜레온’

이완용의 알려지지 않은 행적들을 되돌아 봤다.

◆독립협회장을 지낸 당대 최고의 명필가

이완용(李完用, 1856년 음력 6월 7일~1926년 양력 2월 12일)은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으로 한일합방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중 한 명으로 대한제국을 일본에게 바친

친일 매국노의 수뇌이자 대명사로 불린다.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 본관은 우봉(牛峰)이다.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에서 출생 그의 부친은 이호석(李鎬奭)이였다.

그는 어렸을 적에 집안이 가난하여 불우하게 보냈으나 12살이 되던무렵,

이호준(李鎬俊)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형편이 달라졌다.

이호준(李鎬俊)은 이조참의, 승정원 동승부지,한성부판윤 등

여러 고위직을 지닌 관료이자 흥선대원군과 친한 친구관계였다.

당시 후계자를 위해 가문에서 총명한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에

출세에 필요 의해 맺어진 부자관계 였으며,

이완용 자신에게 출세의 길을 보장 받으면서 학문을 익히면서 성장해 나아갔다.

 

1882년, 25세 나이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한 후,

3년만에 정3품직에 오르고 세자 순종을 가르처 사제관계 맺기도 한다.

 

과거급제 후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영어를 배운 그는

1887년 7월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의 통역으로 미국에 건너가

국제정세에 눈을 뜨고 친미파가 됐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1896) 당시에는

친러파 내각의 핵심에 섰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1905)한 직후부터는 친일의 선봉에 서서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을 연거푸 성사 시킨다.

1907년 2월,

그는 조카이자 훗날 자신의 전기 ‘일당기사(一堂紀事)’를 편집한 김명수(金明秀)에게

“천도(天道)에는 춘하추동이 있고 인사(人事)에는 동서남북이 있으니,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變易)하지 않으면 이는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 이라고 말해 자신의 변신을 합리화 했다.

이완용이 항상 외세의 편에 섰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한 때 독립협회장을 지내고 만민공동회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서재필이 발행한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자 논설은

“이완용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면서

그를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극찬하고 있다.

독립문 건립에도 가장 많은 돈을 기부한 그는 현재까지도

독립문 현판 글씨의 작성자라는 소문의 중심 에 있을 정도로 명망 있던 지식인 이었다.

 

이완용은 독립협회 연설에서 이런말을 남긴 바 있다.

 

"독립을 하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 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세계사에서 두 본보기가 있는데,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 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 하기에 달려 있다.

조선 사람들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애국은 잠시뿐이었다.

무대신으로 재직하며 많은 이권을 외국에 넘겨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연유로 독립협회에서 제명된 후,

한 동안 정세를 살피다가 본격적인 친일행보에 들어선다.

◆며느리와의 부적절한 관계 소문까지

이완용에 대해 세간의 악평이 난무한 것은 당연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그가 죽은 장남의 처 임건구(任乾九)와 사통(私通)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한일병합 때 울분을 참지 못해 음독 자결한 학자 황현(黃玹, 1855~1910)이 쓴 역사서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을사늑약 후 이완용의 아들 승구(升九)가

일본 유학 중 귀국해 집에 왔더니 아버지가 처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그래서 ‘이제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했으니 내가 죽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

탄식하며 자결했고, 이후 이완용이 며느리를 아예 첩처럼 데리고 살았다”는 풍문이 적혀있다.

당시 언론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가 이재명 의사의 칼에 맞고 대한의원에 입원해있던 1910년 1월 5일,

대한매일신보는 ‘총리대신 며느리 임 부인은 병든 시아버지를 간호하고자

의원까지 들어가서 약시중(侍湯)에 힘쓴다지.

평시에는 ‘색양(色養)’하여 그 즐거움을 다하더니 병에 걸리자 저렇게 걱정하다니

그 효성은 천만고의 특색일세’라고 비꼬았다.

이러한 ‘근친 스캔들’은 오랜 기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완용이 사망하자 월간지 ‘개벽’ 1926년 3월호에는

“지하에 있는 이재명 의사는 웃겠지만

팔자 궂은 과부 며느리는 유달리 슬퍼할 것”이라고 비웃었다.

이에 대해 학계는 “사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장남 승구의 사인은 자살이 아니라 병사”,

“사망시점은 한일병합은 물론 을사늑약이 체결되기도 전인 1905년 8월”,

“당시 사료들의 감정적 서술 경향” 등이 그 근거다.

그러나 “민중들의 증오와 응징의 감정이 표출된 현상”이라는 점에서는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

◆가문의 쇠락(衰落)

이완용은 매국의 대가로 ‘경성 최고의 현금 부호’가 됐다.

1925년 당시 파악된 현금 자산만 300만원(현재 가치로 약 600억 원)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부귀영화 이면에는 조선 민중의 세찬 응징이 기다리고 있었다.

헤이그 특사 사건(1907) 직후 이완용은 고종에게 양위(讓位)를 종용했고,

결국 그 해 7월 20일 순종의 즉위식이 열렸다.

그 시각 성난 군중들은 중림동 그의 집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가재도구, 고문서, 우봉 이씨 조상들의 신주(神主)까지 전소됐다.

훗날 그는 조상 신주가 불에 탄 일을

“일생 중 가장 가슴 아픈 일”이라고 회고했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총리대신 이 었음에도 고종이 집을 하사할 때까지 반년 동안

이토 히로부미의 통감 관저와 형 이윤용 집을 숨어서 전전해야 했다.

그는 거리를 지날 때마다 청소년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대한매일신보 1908년 12월 18일자). 종종 개에 비유되기도 했고

민영찬의 중국인 첩으로 부터 침 세례를 받기도 했다(대한매일신보 1909년 4월 14일자).

그의 조카는 양주 선영에 갔다가

의병들에게 인질로 잡힌 적도 있다(황성신문 1909년 10월 1일자).

결국 1909년 12월 22일 그는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다

군밤장수로 변장한 이재명 의사 의 칼에 찔려 왼쪽 폐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때의 후유증으로 1926년 사망할 때까지 해수병(기침병), 폐렴 등 폐질환을 앓았다.

사망 후 그의 묘는 상습적으로 훼손됐다.

익산경찰서에서 순사를 배치해 지킬 정도로 훼손이 거듭됐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이완용은 죽어서도 일본 순사의 보호를 받는다”며 비웃었다.

해방 후에는 소풍 나온 초등학생들에게도 짓밟히는 수모를 겪다가

1979년 증손자 이석형에 의해 화장돼 인근 냇가에 뿌려졌다.

"나는 이완용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의 특권의식, 야비한 교활성과 음흉함, 그와 같거나 열등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고집스럽고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는 굴욕적일 만큼 복종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편견을 갖게 한다.

이완용은 철저한 기회주의자요 변절주의자 아부주의자 였다고 할 수 있다.

주지 하다시피 이완용은 초창기 독립협회의 의장이었다.

독립협회의 구성원이 대부분 우습지만 일본과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지만 말이다."
- 윤치호 일기 내용中-

 

조선시대 최고 명문가 중 하나였던 그의 집안도 공중분해 됐다.

세간의 손가락질을 이기지 못한 손자 이병주는 1962년 일본으로 밀항해 귀화했고,

증손자 이윤형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는 등

직계후손은 뿔뿔이 흩어져 사실상 쇠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조선일보에서 발췌